본문 바로가기

Mr 웨일의 가상현실 칼럼

Mr. 웨일이 예측하는 가상현실의 미래 4단계 - 트랜스휴머니즘 기술로 말미암아 탄생한 '대안현실'의 시대

현실

 

현실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느끼는 현실은 과연 실재(實在)와 같은 것인가?

 

우리가 느끼고 있는 이 현실은

 

우리가 사는 실제 세계를 얼마나 잘 담고 있는 것인가?

 

혹은,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헛된 것인가?

 

 

 

가상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노라면

 

많은 이들의 뇌리에

 

가상현실이란 '가짜현실'이라는 등식이 박혀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상현실이라함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을 모방하여

 

한낯 피조물인 인간이 손으로 만든 불완전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 피조물이 종교관에서의 신으로 인해 만들어진 존재든, 

 

아니면 빅뱅으로 대유되는 과학적 의미에서의 창조주체에 의한 피조물이든 상관없이)

 

 

 

하지만 만약 지금 이 현실과 구분할 수 없는 수준의 가상현실이 있다면

 

우리는 그 가상현실 속 경험을

 

'가짜'라고 부를 수 있는가?

 

어쩌면 우리가 느끼는 이 현실이

 

미래 발전한 인류문명이 만들어낼 가상현실만큼이나

 

가짜일 수 있지 않을까?

 

 

 

이 아리송하고 기묘한 담론은

 

제 4단계 가상현실이자 궁극의 가상현실,

 

'대안현실'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풀다이브도 능가하는 궁극의 4단계 가상현실은 어떤 모습일까?

 

 

 

***********************<4단계 - 트랜스휴머니즘 기술로 말미암아 탄생한 '대안현실'> 미리 살펴보기*********************

 

* 과학적으로 완벽하게 규명된 인간의식과 의식의 연속성 

* 과학적으로 완벽하게 존재론적 미스터리가 해명된 미래

* 트랜스휴머니즘 기술의 발달로 자신의 정신을 온전하게 유지하면서도 신체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음

* 신체는 물론 뇌의 재질까지 바꾸면서도 트랜스휴먼의 의식을 영속시킬 수 있음

* 마인드 업로딩을 통해 육체 없이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시대

* 레이 커즈와일이 자신의 저서 <특이점이 온다>에서 묘사한, 육체가 필요없는 신인류의 시대

* 뇌의 개조를 통해 기존의 뇌보다 비교도 할 수 없는 신속한 연산 가능

* 개조뇌의 연산을 통해 찰나의 순간동안 수백년 분량의 시간 밀도 속에서 살 수 있음

* 뇌 개조를 통해 인간이 느낄 수 없는 감각과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는 것이 가능

* 수학적으로 이 우주와 동등한 차원, 혹은 우리 우주를 능가하는 차원의 가상현실이 만들어짐

* 가상현실은 단순한 가상현실의 개념을 넘어 또 하나의 우주, 멀티버스(multiverse)의 개념으로 확장

* 오늘날 우리가 수많은 게임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수많은 가상우주에서 수많은 인생을 살아볼 수 있음

 

******************************************************************************************************

 

이 4단계 가상현실,

 

최종의 가상현실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미래 인류의 문명이 극도로 발달하여

 

연산장치에 또 다른 우주를 구현할 수 있게 되면

 

문명의 구성원들은 그 우주에 거주할 육신을 만들어

 

수많은 인생을 살아보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

 

 

 

이것이 바로 궁극의 가상현실이다.

 

 

 

 

레이커즈와일이 자신의 저서 <특이점이 온다>에서 설명하는

 

육체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인류가 완전히 가상현실에서 거주하는 시대가 바로 이 4단계 가상현실인 것이다.

 

 

 

이 4단계 가상현실이 3단계 가상현실과 차별화되는 가장 큰 특징은

 

트랜스휴먼* 기술이 접목됨으로써

 

가상현실에서의 경험이

 

인간으로서의 경험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느낄 수 없는 감각과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트랜스휴먼 - 인간의 신체나 기능을 개조하여 더욱 향상된 능력을 발휘하며 삶을 영위하는 인간)

 

 

 

인간을 초월한 경험이라 한다면

 

사실 인간인 우리의 입장에선

 

상상하거나 공감하기도 힘들뿐더러

 

굳이 필요성을 느끼지도 못한다.

 

 

 

하지만 만약 우리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통해

 

이 '인간을 초월한 경험'을 설명한다면 어떨까.

 

 

만약 태초에 모든 인간이 

 

마치 뱀처럼 팔 다리가 없이 태어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된다면 인간은 뱀이 그러하듯

 

팔 다리가 없는 것에 불만을 가지지 않고

 

그것이 아주 당연한 일이라고 여길 것이다.

 

 

 

시대를 앞서간 어떤 인간이

 

언젠가 인간은 팔다리를 달아야 한다고 주장하면 어떻게 될까?

 

누군가는 인간에게 팔다리가 달린 것이 징그럽다고 느끼며

 

거부감을 나타낼 것이고

 

심지어는 팔다리를 갖는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상상하기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미래 문명의 발달로

 

인간이 팔다리를 한 번 달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 번 팔다리를 달고 거기에 적응한 인간이 

 

다시 팔다리를 포기하고 원래의 인간으로 돌아가려고 할까?

 

 

 

또 다른 예시를 들어보겠다.

 

만약 인간이 마치 지네처럼

 

태초부터 시각이 없고

 

더듬이, 즉 촉각만으로 세상을 인지하는 생물이라고 가정해보자.

 

누군가는 언젠가 인간이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더듬이가 닿지 않는 곳의 물체를 식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 인간의 주장에 다수의 사람들은 해괴한 소리라고 여긴다.

 

거의 모든 인간이 시각을 느낀다는 개념자체를 상상할 수 조차 없다.

 

그러나 미래 문명이 발달하여

 

인간이 시각을 갖게 된다면

 

인간은 시각을 포기하려 할 것인가?

 

 

 

 

 

이 트랜스휴먼의 효용에 대해 보다 더 공감할 수 있는 방법은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는 것이다.

 

인간 뇌의 신경신호전달물질의 수용체는 한정되어 있다.

 

다르게 말하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대의 쾌락이 100이라고 가정한다면

 

인간은 최대 100까지의 쾌락밖에 느낄 수 없다.

 

그 이상의 쾌락은 느낄 수 없을 뿐더러

 

지속해서 100에 가까운 쾌락을 느끼려는 순간

 

인간의 뇌는 인체 항상성으로 인해

 

쾌락 수용체 (주로 도파민 수용체)의 수를 줄이게 된다.

 

이는 인간이라서 지니게 되는 한계이다.

 

하지만 만약 뇌를 개조하여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대치의 쾌락인 100을

 

압도적으로 상회하는 1000, 10000의 쾌락을 느끼도록 할 수 있다면

 

그 쾌락이 어느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트랜스휴먼 기술을 통해

 

인간 몸의 항상성까지 제어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금단증상 없이 지속적으로 초월적인 쾌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초월한 경험이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인간은 트랜스휴머니즘 기술을 통해

 

완전몰입형 가상현실에 접속하여

 

인간이 아닌 전혀 다른 존재가 됨으로써

 

인간이었다면 느끼지 못할 압도적인 효용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왜 가상현실에서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되기 위해

 

실제 신체를 변형시키는 트랜스휴먼 기술이 필요한 것인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인간의 의식, 인간의 뇌, 신경은

 

인간의 신체와 무관하지 않다.

 

꼬리가 없는 인간이 

 

꼬리를 움직이는 감각을 느끼도록 해주는 뇌의 신경다발은

 

존재하지 않는다.

 

손가락이 양 쪽 다섯개, 총 10개인 사람이

 

여섯번째 손가락, 일곱번째 손가락을 바늘에 찔렸을 때

 

느낄 고통을 담당해주는 뇌의 부위나 신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체가 변형되는 경우

 

(사지절단 등)

 

인간의 뇌는 뇌가소성으로 인해

 

신경배치가 변화하게 되고 

 

새로운 신체에 적응하게 된다.

 

이처럼, 가상현실이든 실제 현실이든

 

인간을 초월한 신체 경험을 느끼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뇌의 개조가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가상현실에서 그러한 새로운 감각과

 

새로운 쾌락을 느끼기 위해

 

굳이 신체 개조까지 감행해야된다는 이야기인가?

 

 

 

하지만 이때 감행되는 신체개조의 수단은

 

단순히 새로운 쾌감 그 이상의 효용을 지니고 있다.

 

이 때 감행되는 신체개조의 수단은

 

마인드 업로딩(mind uploading),

 

즉, 인간의 의식을 컴퓨터와 같은 연산장치에 옮기는 것이다.

 

 

 

마인드 업로딩을 통해 가상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데에는 여러가지 효용이 있다.

 

첫번째, 진정한 의미의 영생을 누리는 것이 가능하다.

 

영생은 크게 육체적 영생과 육체에 종속되지 않는 정신적 영생으로 나눠볼 수 있다.

 

육체적 영생은 불의의 사고를 당하여 사망하게 된다면

 

영생이라는 단어가 무색해진다.

 

그만큼 육체적 영생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으며 불완전하다 할 수 있다.

 

반면 육체에 종속되지 않는 정신적 영생은 어떨까.

 

이 경우엔 연산장치에 정신을 업로드하는 마인드 업로딩이 정신적 영생이 되겠다.

 

물론 이 경우엔 연산장치가 파괴되거나 오류가 생길 경우

 

육체적 영생과 마찬가지로 파괴가 가능하다 할 수 있으나

 

인간 정신을 연산장치로 옮기는 것이 가능한 미래라면

 

이 시대의 시스템이 지닌 자기보호 기제는 상상을 초월하는 완성도를 지녔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다

 

인간이 인간의 육체로서 살아가는 것보다는 죽음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마인드 업로딩을 통한 가상현실속의 영생이 지닌 효용은 이뿐만이 아니다.

 

육체를 탈피하여 자신의 의식을 구성하는 시스템이 

 

연산장치 내의 새로운 시스템과 결합하여

 

언제든지 자신을 새로운 존재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메리트이다.

 

이를테면 가상현실 속에서 

 

평소 흑인이 되어보고 싶었던 황인종은 흑인이 되어볼 수도 있으며

 

여성이 되어보고 싶었던 남자는 여성이 될 수도,

 

심지어는 아예 다른 종(species)이 되고 싶은 사람은 자신의 종을 선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가상현실의 육체, 그리고 그 육체에 적합하게 반응하는 가상현실 속의 의식은

 

기존에 있던 인종, 성별, 종족간의 차별을 모두 허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필요할 때만 현실의 육체를 빌려 생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인간을 초월하는 경험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비교적 말초적인 쾌락만을 예시로 들었으나

 

보다 고차원적인 정신경험을 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의 정신과 융합하여

 

군집형 인격체가 됨으로써

 

전혀 다른 정신경험을 체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베토벤과 모짜르트, 반 고흐와 같은 희대의 천재 예술가들의 정신과

 

자신의 정신이 융합하여 새로운 인격체가 된다면

 

과연 어떠한 정신적 경험을 할 수가 있는가?

 

 

 

혹은 연산장치에서 에뮬레이팅되고 있는

 

자신의 정신이 그 시대의 초지능 인공지능과 연결되어

 

초지능에 필적하는 지능을 지니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역시 현실과 동떨어진 일이므로 

 

보다 와닿게 예시를 들어보자면

 

해파리를 들 수 있다.

 

 

해파리는 신경생물학적으로 매우 원시적인 생물로

 

부력과 통각, 촉각, 포만감 수준의 

 

원초적인 감각만을 느끼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우연히 해파리가 

 

이타심, 앎의 즐거움, 아이러니, 슬픈 영화를 보고 느끼는 감동,

 

우월감에서 오는 희열, 유머스러운 것을 보고 느끼는 웃긴 감정과 같은

 

매우 고차원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면 

 

해파리는 이후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을 것인가?

 

 

 

마인드 업로딩을 통해 

 

육체적 정신적으로 아무런 제약이 없는 가상현실에서 활동하게 될 인류는

 

기존의 인류가 해파리 이하 수준으로 느껴질만큼

 

고차원적인 사고와 감정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이 

 

이러한 초월적인 존재의 고차원적인 정신경험을 원하는가에 대해선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글을 쓰는 필자 역시

 

인간의 입장에서 고차원적인 존재의 정신경험을 

 

그렇게 바라진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필자는 제 4단계 가상현실의 핵심 키워드로

 

트랜스휴머니즘을 내걸었는가?

 

바로 트랜스휴머니즘이

 

다수의 사람들이 원할만한 가상현실 경험 중 하나를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바로 가상현실 시간 왜곡이다. 

 

 

 

옛날 우리나라 전설에서 비롯된 속담에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섞는다는 말이 있다.

 

가상현실 시간 왜곡은

 

이 속담의 정반대에 있는 기술이라 할 수 있다.

 

 

 

도대체 가상현실 시간 왜곡이란 무엇인가.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만약 가상현실에서 재벌 3세가 되어 10년 정도를 살다가

 

가상현실에서 나와보니

 

고작 1시간이 흐르는 것이다.

 

마치 영화 <아더라이프>의 내용과 흡사한 것이다.

 

 

 

이는 분명 적어도 인간을 초월한 감각경험과 정신경험보단

 

많은 이들이 겪고 싶어할만한 가상현실 경험일테다.

 

 

 

 

하지만 이런 기술을 누리기 위해

 

굳이 트랜스휴먼 기술을 적용시켜야 하는가?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완전몰입형가상현실은

 

우리의 뇌가 (혹은 우리의 정신이)

 

가상현실의 환경과 실시간으로 상호작용함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만약 1시간 동안 10년이 흐르는 가상현실과

 

우리의 뇌가 상호작용을 하려면

 

어떠한 결론이 나오겠는가?

 

 

 

 

 

무슨 수단을 쓰든 

 

우리의 뇌를 87600배 빠르게 회전시키도록 해야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상식적으로 인간의 인체에서 이러한 일이 가능하겠는가.

 

고려해야할 부분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뇌의 연산이 빨라지려면 그만큼 우리 뇌에 필요한 산소도 천문학적으로 늘어난다.

 

이것을 심장 박동을 통한 혈류이동을 통해 해결한다고 가정하면

 

심장은 분당 무려 500만번도 넘게 뛰어야한다는 결과가 나온다.

 

이렇게 된다면 인체의 모든 심혈관은

 

혈압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리고 말 것이다.

 

직접 뇌에 방대한 산소를 주입하는 방법 역시

 

초 단위로 오차가 생기면 치명적인 결과가 생길 수 있다.

 

 

 

뿐만 아니다.

 

뇌활동 역시 엄연한 칼로리를 소모하는 활동으로

 

1시간 동안 10년의 정신경험을 한다는 것은

 

1시간에 뇌가 10년동안 필요한 칼로리를 소모해야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이 모든 문제를 사소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문제점은

 

바로 우리의 신경전달물질 속도의 한계다.

 

우리의 신경전달물질 속도는 초속 10미터이다.

 

초속 10미터라고 하면 언뜻 듣기에 매우 빨라보이지만

 

실은 우사인볼트보다도 느리다.

 

반면 컴퓨터와 같은 전기회로 기반의 연산장치의 정보전달 속도는

 

무려 광속에 가까우며

 

미국의 신경과학자 샘 해리스의 말에 다르면

 

컴퓨터의 전기신호는 인간의 신경전달물질속도보다 약

 

100만배 가량 빠르다고 한다.

 

가상현실을 구현하는 연산장치의 속도는

 

1시간의 시간에 10년의 밀도를 빠르게 채울 수 있는 반면

 

인간의 뇌는 물리적으로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뇌는 물리적으로

 

1시간에 10년을 경험하는 것과 같은

 

극단적인 가상현실경험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트랜스휴먼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아예 우리의 의식을 연산장치에 옮긴다면

 

우리는 뇌라는 유기체 덩어리의 제약에서 벗어나

 

100만배 빠르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상현실 시간왜곡 기술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 4단계 가상현실의 가장 큰 의의 중 하나는 

 

바로 살면서 인생은 단 하나 뿐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패러다임을

 

완전히 깨부술 수 있는 수단이라는 점이다.

 

 

 

샘해리스의 말을 인용하여

 

인간의 신경전달물질 속도보다

 

광섬유 회로의 신호가 100만배 빠르다는 점을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대입해본다면

 

우리는 아인슈타인, 스티브잡스, 피카소, 이 세 명의 인생을

 

단 2시간도 안 되어 누락없이 모두 살아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반드시 우리가 이 엄청난 4단계 가상현실을 통해서 살아보는 인물이

 

아인슈티안인이나 스티브잡스나 피카소일 필요는 없다.

 

각자 살고 싶은 인생을 ,

 

말 그대로 한 명 분량의 인생을 

 

아주 찰나에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 인생은 평소에 동경하던 인물의 인생이 될 수도 있으며

 

평소 부러웠던 인물의 인생이 될 수도,

 

아니면 또 다른 나만의 인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또 다른 나만의 인생이라면

 

지금 만족하는 부분은 모조리 남겨두고

 

지금 만족하지 않는 부분은 모조리 바꾼채로

 

살아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심지어는 소설이나 영화속 주인공으로 살아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이 인생들을 한 번만 살 수 있는 게 아닌,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셀 수도 없이 많이 살 수 있다는 것이

 

이 4단계 가상현실 시대의 큰 혜택인 것이다.

 

 

 

불교의 환생이 말 그대로 과학기술을 통해 구현되는 것이나 다름 없으며

 

기독교의 천국이 마인드 업로딩을 통해 구현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그렇게 살게 되는 인생은

 

가짜 인생이 아니냐고.

 

가상현실은 결국 가짜가 아니냐고.

 

 

 

 

하지만 필자는 되려 반문한다.

 

어떠한 현실을 가짜로 만들고

 

어떠한 현실을 진짜로 만드는 기준은 무엇인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은 온전히 진짜로만 이루어진 것인가?

 

우리의 뇌는 항상 인지상의 오류를 범한다.

 

뇌의 오류는 착시현상부터 시작해서 끝도 없이 나열할 수 있다.

 

 

이를 테면 안경을 쓰는 사람은 매일 겪는 현상이 하나 있다.

 

안경을 쓰는 사람은 특별히 신경쓰지 않는 한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안경테를 인식하지 못한다.

 

 

만약 우리가 느끼는 현실이 모두 진짜라면

 

엄연히 우리의 코 앞에 실존하는 안경 역시 느껴야 한다.

 

 

 

이러한 인간의 불완전한 인지 체계를 꼬집는 유명한 실험으로는 

 

다음과 같은 실험을 들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Sv6jn2bUNA&feature=youtu.be

 

만약 이 실험으로 인해 인지체계가 농락당한 이들은

 

영상을 보는 순간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 것인가?

 

엄연한 '진짜 현실'을 포착하지 못하고 거짓된 현실을 포착하였으니까?

 

 

 

또 다른 이야기는 어떠한가.

 

만약 누군가가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부모가 모두 친부모가 아닌 사실을 모르고 죽었다면

 

그 사람의 인생에 있어 친부모가 있었던 현실은 가짜인가?

 

 

 

물론 제 3자의 객관적인 입장에 한해선

 

그 부모가 친부모였던 현실은 가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인생을 살았던 당사자는 어떠한가.

 

죽을 때 까지 알지 못했기에

 

그 사람의 인생에 있어

 

그 부모는 모두 진짜 친부모인 셈이다.

 

적어도 그 인생을 살아가는 입장에선

 

친부모가 있는 현실이

 

진짜 현실인 것이다.

 

 

비슷한 논리로

 

평생 자신이 발견한 대륙을 인도라고 굳게 믿었던

 

콜럼버스의 인생에 있어

 

아메리카는 없고 인도만 있었던 현실은 가짜인가?

 

지동설을 알기 전의 인류는

 

모두 가짜 현실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인가?

 

 

 

우리의 기억은 어떠한가

 

뇌과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의 연구가 진행될수록

 

인간의 기억이 얼마나 신뢰성이 떨어지는지 명명백백히 밝혀지고 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 중

 

500원의 앞면에 있는 학이 어느 방향을 향해 날고 있는지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 것인가?

 

자유의 여신상이 어느 손에 횟불을 들고 있는가?

 

자유의 여신상 왕관에는 뿔이 몇개나 솟아있는가?

 

 

자신의 유년시절 기억에서

 

왜곡되지 않은 기억은 과연 얼마나 되는가?

 

심지어 최면과 암시를 통해 의도적으로 유년시절 기억을 조작하는 것이

 

실험과 연구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 밝혀진 지금

 

다수 국가의 법정에선 온전히 기억에만 의존하는 진술은

 

증거로 채택되지 않는다.

 

 

 

만약 우리의 인생을 구성하는 것이

 

우리의 기억이라면

 

불완전한 기억이 다수를 차지하는 우리의 인생은

 

가짜인가?

 

 

 

 

마지막으로,

 

양자역학과 같은 과학현상은 어떠한가?

 

리처드 파인만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양자역학을 이해했다는 사람은 양자역학을 잘못 이해한 사람이다"

 

 

 

그만큼 양자역학을 직관적, 감각적 차원에서까지 이해한 사람은

 

전무하다는 것을 확신에 찬 어조로 이야기 한 것이다.

 

심지어 그 아인슈타인조차

 

직관적으로 양자역학의 오묘함을 납득하지 못하여

 

죽기 직전까지 양자역학을 부인하였다.

 

 

하지만 결국 양자역학은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까닭은

 

거시세계에 익숙하도록 인지체계가 진화한 인간이

 

애초에 미시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김상욱 교수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양자역학이 잘못된 것이 아닌

 

우리가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양자역학이라는 엄연한 실재적 실체가 있음에도

 

그것을 평생 감각으로, 직관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모든 인간들은,

 

즉 이 세상의 실체를 느끼지 못하고 죽는 모든 인간의 현실은

 

가짜인가?

 

 

 

 

어떠한가.

 

이 일련의 예시들을 나열하는 논리 전개를 보고 있자면

 

어딘가 불쾌하고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것이다.

 

바로 '현실'과 '실재'의 정의가 모호하여 벌어지는

 

논리적 오류를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선

 

'현실'의 조작적 정의를 통하여

 

필자가 말하는 현실의 범위와 개념이 어디까진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2007년 <수학적 우주 논문>에서 

 

'수학적 우주가설'을 주장한

 

MIT의 물리학 교수

 

맥스 테그마크는

 

현실의 층위를 3가지로 나누고 있다.

 

 

 

1) 내적 현실

 

2) 합의적 현실

 

3) 외적 현실

 

 

 

첫번째 내적 현실이란 무엇인가.

 

우리 모든 인간에게 가장 익숙한 현실이 바로 

 

내적 현실이다.

 

내적 현실이란 우리의 뇌에서 받아들이는 현실을 의미한다.

 

 

이 내적현실을 단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색맹 환자이다.

 

적색맹 환자는 빨간색을 인식하지 못하고 회색이나 검은 계열의 색으로 인식하는데

 

색맹이 아닌 제 3자에겐 빨간색은 엄연히 빨간색이지만

 

적색맹 환자의 '내적현실'에서

 

빨간색은 회색이다.

 

 

 

그렇다면 적색맹 환자의 내적현실에 빨간색은 없으니

 

빨간색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위에서 말했듯 다른 사람은 빨간색을 인지한다.

 

비록 적색맹 환자는 빨간색을 느낄 수 없지만

 

의무교육을 통해 빨간색을 띠는 가시광선의 파장과

 

그 가시광선을 빨간색으로 인식하는 적원추세포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어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빨간색의 존재를 알게 된다.

 

굳이 색맹 환자 뿐 아니라

 

인간 대부분이 느끼지 못하는 비가시광선 역시

 

인간의 내적현실에선 감각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이나

 

과학기술의 발달을 통해 '관측'됨으로써 

 

하나의 현실로 인정되게 된다.

 

이처럼 과학적 연구와 

 

집단적 내적현실,

 

즉 개인들의 내적현실의 교집합을 

 

합의된 현실,

 

2) 합의적 현실

 

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합의적 현실은

 

소위 말하는 학계의 정설에 포함되는 내용이다.

 

마지막

 

3) 외적현실은

 

가상현실이 가짜가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의

 

'가짜현실'과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개념이다.

 

바로 진정한 현실,

 

인간의 인지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절대적 현실, 진정한 현실이 바로 이 외적현실이다.

 

칸트 철학에서 말하는 Thing in itself,

 

즉 물자체(物自體)가 바로 이 외적 현실이며

 

내적현실은 칸트 철학의 Thing as it appear에 해당한다 할 수 있고

 

합의적 현실은 인간의 집단 지성이 Thing in itself에 가까워지기 위해 

 

시행착오를 거치는 과정에서 창출되는

 

정제된 Thing as it appear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적현실과 합의적현실이 포함하지 못하는

 

외적현실이 있을 것이다.

 

당연히 외적현실이 내적현실과 합의적현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인간이 인간이라서 영원히 파악할 수 없는 현실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위의 양자역학이 바로 그런 현실이다.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직관의 차원에서 양자역학을 납득할 수 없으나

 

외적현실의 언어라고 평가받는 수학에선

 

양자역학이 이 외적세계를 완전히 설명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필자는 다시 되묻고 싶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인생을

 

내적현실로서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신의 내적현실이 

 

외적현실이라고 대부분의 순간을 착각한다.

 

실은 내적현실은 결코 

 

외적 현실, 즉 '진짜 현실'이 아닌데 말이다.

 

 

 

그렇다면 만약

 

내적현실 차원에서 

 

우리의 현실과 전혀 구분할 수 없는 

 

가상현실이 있다면

 

그것이 외적현실과 다르다고 해서

 

우리의 내적현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가상현실은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보다 행복한 내적현실을 제공하는 서비스인 셈이다.

 

그러나 만약 이 내적현실을 제공하는 서비스의 물적 실체,

 

즉 가상현실 환경이 현실의 우주만큼이나 정교하고 방대하다면,

 

혹은 그 이상으로 방대하다면

 

과연 가상현실은 우리 우주의 외적현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할 수 있는가?

 

 

 

이론상 266큐빗 이상의 양자컴퓨터는

 

우리 관측가능우주의 원자수보다도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다.

 

미래에 그런 양자컴퓨터에서

 

우리 우주보다 정교한 가상 우주를 구현한다면

 

이 우주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외적현실과 다르다 할 수 있는가?

 

 

 

이런 의미에서 

 

인류 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가상현실의 마지막 종착지,

 

트랜스휴머니즘으로 말미암은 가상현실은

 

또 다른 하나의 우주,

 

멀티버스(multiverse)로서의 '대안현실'이 되는 것이다.

 

 

 

즉, 필자는

 

이 4단계 가상현실에서 겪게 되는 모든 일들이

 

실제 우리 인생과 동등한 차원에 있다고 본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라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인생이

 

가상현실의 일부가 아니라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옥스포드 대학교 철학과 교수 

 

닉 보스트롬이 제안한

 

모의실험 가설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펼친다.

 

 

 

전제1) 지적 문명은 인공의식을 갖춘 가상현실을 만들 수 있다

 

전제 2) 가상현실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면 가상현실은 무수히 많이 만들어질 것이다.

 

마치 지금의 게임 시장에 수많은 게임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전제 3) 지적 문명이 그정도로 발달했다면 꽤 긴 시간 문명을 지속해나가리라 추측할 수 있으며

 

그 기간동안 수십억개의 가상현실이 만들어 질 수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중간결론 ) 그렇다는 건 자아가 있는 인공의식, 즉 NPC들이 살고 있는 가상현실이

 

매우 많이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여기가 그 가상현실이 아닐 확률은 얼마나 되는가?

우리가 그 NPC가 아닐 확률은 얼마나 되는가?

 

 

만약 앞의 세 가지 전제가 참이라면

 

이곳이 가상현실 세계가 아닐 확률은 0에 수렴한다.

 

물론 닉 보스트롬의 논리는 스스로 입증책임을 다하고 있지 않으므로

 

진지하게 지지하거나 반박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러나 다소 심오한 기분이 들게 하는 묘한 힘이 있다.

 

 

 

필자는 이 닉 보스트롬의 모의실험 가설의 내용틀을 

 

약간 뒤틀어 위에서 언급한 '대안현실'의 논지를 강화하고자 한다.

 

 

 

전제 1) 극도로 발전한 인간 문명은 짧은 찰나에

 

하나의 인생을 체험할 수 있는 가상현실을 만들 수 있다

 

전제 2) 극도로 발전한 인간 문명은 오랜 기간 영속할 가능성이 높으며

 

그 기간동안 무수히 많은 인생 가상현실을 만들 수 있다

 

전제 3)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인류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자신이 원하는 만큼

 

오래동안 살 수 있다

 

 

 

 

중간결론) 이 문명을 살아가는 인류는

 

자신이 살아가는 동안 무수히 많은 사람의 인생을 경험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인생이 가상현실 체험이 아닐 확률은 얼마나 되는가?

 

지금 나의 인생이 진짜 본래 인생일 확률은 얼마나 되는가? 

 

 

 

물론 필자가 진지하게 이 논리가 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가설이 시사하는 바는

 

지금 이 인생이 가상현실 체험일 수 있다는 발상 하나만으로

 

이 4단계 가상현실, 궁극의 가상현실이 지닌 저력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만약 인간의 욕망이 영생이라면,

 

그리고 질리지 않는 다양함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면

 

가상현실의 최종 종착지는

 

필자가 주장하는 4단계 가상현실, 대안현실의 모습에 수렴하지 않을까 예측해본다.

 

 

 

그러나 이 4단계 가상현실이 성립되기 위해선

 

아주 중요하고도 어려운 난제 하나가 해결되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 의식의 연속성,

 

즉 존재론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다.

 

 

 

상술한 마인드 업로딩의 설명을 들은 독자들 중 일부는

 

묘한 불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마인드 업로딩 되어 육체로부터 탈피한 내가

 

마인드 업로딩 되기 전의 나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마인드 업로딩이란 내 뇌의 정보를 연산장치에 옮김으로써

 

나의 의식을 옮기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곳에 옮겨진 결과물이 나인가?

 

만약 현실의 내가 그대로 멀쩡히 존재하는데

 

새롭게 복제된 나와 공존하면

 

둘 중 어느 것이 나인가?

 

이러한 의식의 오묘한 미스터리가 해결되지 않는한

 

이 4단계 가상현실은 영원히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 궁극의 가상현실이 성립하기 위해선

 

인류 문명이 인간 존재론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필수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

 

https://www.youtube.com/watch?v=Pel_idvsD-s